[Memoir Part 1] Ep.15 – 또다른 회색집을 향해
"그날 우리는 새로운 길로 간다고 믿었지만,
결국 또 다른 회색 집을 향해 걷고 있었다.
바다를 마주하고 서 있던 작은 집이 어둠 속으로 잠겨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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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가 세 번째로 집을 나갔다 돌아온 날이었다. 아버지는 더 이상 매를 들지 않았다.
아버지의 미싱 소리는 예고 없이 뚝 끊기곤 했다. 천 위에 손을 얹은 채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다림질을 하다 말고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는 시간이 길어졌다.
풀죽은 언니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던 아버지는 “허, 저노무 가시나를 우째야겠노” 하고 담배 연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텅 빈 재단 테이블을 쓸어내렸다.
한밤중 잠결에 엄마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가시나 뒤치다꺼리하다 명줄이 짧아지것소. 이놈의 동네, 지긋지긋 하요.”
그 말은 누구를 향한 것도 아니었다. 아버지는 대답 대신 깊은 마른기침을 뱉어냈다.
그날 이후, 엄마는 말없이 바깥을 보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러다 아버지는 재봉틀을 분리해 먼지를 털어냈다.
보자기 가운데 세워 단단히 묶었다.
그렇게 재봉틀은 집을 떠났다.
집안의 물건들이 하나씩 사라졌다.
방 안이 점점 비어 갔다.
벽에는 물건이 있던 자리만 희미하게 남았다.
어느 날, 우리는 신발을 신고 방 안으로 올라섰다.
텅 빈 방은 낯설었다. 나는 시멘트 벽을 손끝으로 쓸어보았다. 작은오빠는 문지방에 서서 키를 재던 자국을 손으로 짚었다.
“여기 이것 좀 보래이. 이기 뭐꼬 하겠다, 그제?”
아버지는 언니를 떼어놓기 위해 서울행을 정했다. 어른들은 그것을 ‘새로운 시작’이라 불렀다.
날이 어두워졌다. 산비탈의 그림자가 방 안 깊숙이 밀려들었다. 아버지는 이미 보따리를 지고 내려가고 있었다. 엄마는 막내를 안고 남동생을 앞세워 따라갔다. 우리는 말없이 그 뒤를 따랐다.
가파른 흙길을 내려갔다.
어디로 닿을지 모르는 길이었다.
그날 우리는 새로운 길로 간다고 믿었지만, 결국 또 다른 회색 집을 향해 걷고 있었다.
바다를 마주하고 서 있던 작은 집이 어둠 속으로 잠겨 갔다.
아무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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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Memoir Part 1을 마칩니다.
바다를 마주하던 영도의 작은 집이 어둠 속에 잠겼습니다. 낯선 서울의 회색 골목에서 시작될 아이들의 이야기는 잠시 숨을 고른 뒤,
**[Part 2 : 멀고 먼 귀가길]**에서 다시 이어집니다. 곧 돌아오겠습니다.
이 글들은 1970년대 바다 건너편 작은 집에서 자라던 어린 시절을 돌아보며 쓰는 이야기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처음부터 이어서 읽기:
[Memoir Part 1] Ep.1 회색 공장: 낮은 천장 아래 그려진 첫 지도
이전편 읽기:
[Memoir Part 1] Ep.14 – 하얀 우유병 : 끝내 돌아가지 못한 것
1부 완결 (15화).
영도를 떠난 우리 가족의 서울 이야기는 2부에서 계속됩니다.
지금까지 1부를 함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조만간 2부 첫 번째 이야기로 인사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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