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ir Part 1] Ep.13 – 빨간 구두: 손에 쥐지 못했던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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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 나는 처음으로 ‘내 것’을 가지고 싶다는 마음을 알게 되었다.그때까지 ‘새것’을 내 손에 온전히 쥐어 본 적은 거의 없었다. 늘 언니 오빠가 쓰던 것, 입던 것이 전부였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크레파스 한 상자를 사 주셨다. 처음 마주한 새 물건의 감촉에 심장이 묘하게 뛰었다.
투명 케이스를 벗기니 반듯한 종이 상자가 드러났다. 뚜껑을 열자, 매끄러운 왁스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스물네 개의 색들이 가지런히 줄을 서 있었다. 노랑, 분홍, 보라, 연두. 나는 그것들을 차마 쓰지 못했다. 하나씩 꺼내 보았다가 다시 제자리에 넣었다.
미술 시간이 있는 날, 크레파스 를 들고 학교에 갔다. 입구에서 신발을 갈아 신으며 그것을 시멘트 바닥에 내려놓았다. 다시 손을 뻗었을 때, 손끝에는 서늘한 바닥의 감촉만 남아 있었다.
크레파스가 있던 자리는 비어 있었다. 눈앞이 하얘졌다.
복도를 미친 듯이 뒤졌다. 수업 시작 종소리는 무심하게 울렸다. 수업 시간 내내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울음을 삼키느라 어깨가 떨렸다.
학교가 끝났지만 집으로 곧장 갈 수 없었다. 나는 시장 쪽으로 발을 돌렸다. 좁은 골목을 따라 가게들이 줄지어 있었다. 무심코 걷다 신발 가게 앞에서 발이 멈췄다.
진열대 끝에 빨간 에나멜 구두 한 켤레가 있었다. 운동화와 검정 고무신 사이에서 그것만이 유난히 빛났다. 동그란 앞코, 얇은 끈 하나, 작은 금속 버클. 오후 햇살이 그 위를 잠깐 머물렀다.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였다. 하지만 나는 끝내 손을 뻗지 못했다.
집에 돌아와 부엌문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엄마는 그늘진 부엌에서 밀가루 반죽을 하고 있었다.
“와 지 물건 하나도 제대로 못 챙기고 다니노? 써 보지도 몬하고 남 줘뿟네.”
엄마는 반죽을 한 번 힘껏 눌렀다.
“아버지한테는 말하지 마래이. 내도 말 안할끼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 학교에서 집으로 가는 길은 늘 시장을 거쳤다. 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나는 무심한 척 그 앞을 지나쳤다. 내 낡은 신발 끝이 그 진열대 앞을 지날 때마다 시선은 늘 옆으로 미끄러졌다.
“아, 아직도 있네.” 나는 낮게 중얼거렸다.
어느 날이었다. 상점 주인도, 지나가는 행인도 보이지 않았다.
생각보다 손이 먼저 움직였다.
정신을 차릴 틈도 없었다. 나는 그 빨간 것을 가슴에 품고 뛰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저만치 우리 집이 보였다. 끼익 하고 방문을 열리며 아버지의 긴 그림자가 툇마루위에 드리워 졌다. 나는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았다.
나는 그것을 안은 채 다시 뒤돌아 시장으로 달렸다.
시장 골목이 뒤에서 소란스러워졌다.
“어떤 도둑놈의 새끼가 그걸 들고 튀삤노! 내 가만 안나둘끼다!”
발이 멈췄다. 눈앞이 순간적으로 멀어졌다.
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몸을 돌렸다. 외진 골목 안쪽으로 들어섰다.
깨진 벽돌과 젖은 나무판자 더미. 그 사이 어두운 틈이 있었다. 나는 그곳에 빨간 구두를 밀어 넣었다.
광택이 흙먼지 속으로 사라졌다.
며칠을 잠을 이루지 못했다. 문밖 작은 소리에도 몸이 굳었다.
그 뒤, 다시 그 골목 앞까지 갔다.
안을 들여다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손을 넣어도 닿는 것은 흙뿐이었다.
나는 손바닥을 털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 골목을 걸어 나왔다.
내 손에는 끝내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가질 수 없는 것을 탐냈던 대가는 그렇게 허무한 빈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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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들은 1970년대 바다 건너편 작은 집에서 자라던 어린 시절을 돌아보며 쓰는 이야기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처음부터 이어서 읽기:
[Memoir Part 1] Ep.1 회색 공장: 낮은 천장 아래 그려진 첫 지도
이전편 읽기:
[Memoir Part 1] Ep.12 – 불길 속 미소: 이어지지 못했던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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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moir Part 1] Ep.14 – 하얀 우유병 : 끝내 돌아가지 못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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