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ir Part 1] Ep.5 – 명절: 편안함보다 찬바람드는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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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이미지생성 |
그렇게 우리 집 안의 겨울은 늘 조용히 흘러갔다. 하지만 일 년에 한두 번, 고요한 공기의 결이 단숨에 흐트러지는 날이 있었다.
명절이었다.
설날 며칠전부터 방앗간은 쌀 빻는 소리와 가래떡 뽑는 소리로 요란했다. 아주머니들은 밤새 불린 쌀을 대야에 담아 머리에 이고 와 방앗간 앞에 줄을 세웠다. 밤이 되도록 알록달록한 면 보자기를 뒤집어 쓴 대야들이 길게 이어졌다.
방앗간 아저씨는 연신 쌀 대야를 기울여 기계에 털어 넣고, 재빨리 그 대야를 아래에 받쳤다. 레버를 힘껏 당기자 방앗간 전체가 덜덜거리며 진동했다. 그 울림이 내 발바닥을 타고 올라와 심장까지 울렁이게 했다.
기계 속에서 으깨진 쌀이 미끄럼틀을 타듯 내려와 대야 안에 수북이 쌓였다. 아저씨가 미끄럼 판을 텅텅 두드려 남은 가루를 털어냈다. 고소한 쌀가루 냄새가 방앗간 안에 퍼졌다.
바로 옆에서는 가래떡을 뽑았다. 쌀가루를 넣고 위에서 꾹꾹 누르면, 물속 동그란 구멍에서 따끈한 가래떡이 가느다랗게 끝도 없이 밀려나왔다. 아저씨는 말랑한 떡을 적당한 길이로 툭툭 잘라 대야에 나란히 담아 주었다.
방앗간에서 돌아온 엄마는 머리에 인 대야를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대야 위 보자기 틈새로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떡 한 줄기를 꺼내 손가락만큼씩 잘라 나눠 주었다. 쫄깃하고 따끈한 가래떡이 꿀떡꿀떡 목으로 넘어갔다.
밤사이 식어 단단해진 가래떡을 엄마는 도마 위에 올렸다.
엄마와 언니가 그 위를 어슷하게 썰었다.
“똑, 똑, 똑”
얇은 타원형 떡 조각들이 칼날 옆에서 툭툭 떨어졌다.
오빠들은 몇 번 썰어 보고는 슬그머니 뒤로 빠졌다.
설날 아침, 우리는 가장 깨끗한 옷을 골라 입었다. 엄마는 막내를 안고 아버지와 아랫목에 앉았다. 반대편에 우리 다섯 명이 줄지어 섰다. 서로 팔꿈치를 부딪혀 가며 세배를 올렸다.
아버지는 몸을 반쯤 일으켜 바지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냈다. 남동생과 나는 동전 하나씩을 받았다. 언니 오빠들은 나이대로 조금씩 더 받았다.
우리는 들뜬 마음으로 밥상에 둘러앉아 떡국을 먹었다. 고기 한 점 없는 떡국 위로 노란 마가린 기름이 둥글게 떠 있었다. 라면 스프 향과 마가린의 고소한 냄새가 뒤섞여 밥상 위에 퍼졌다.
세뱃돈을 챙겨 고모네 집으로 향했다. 우리는 신이 나서 가파른 언덕길을 폴짝거리며 내려갔다. 발밑에서 흙먼지가 일었다. 나는 동전이 달아날까 봐 호주머니를 꼭 움켜쥐었다. 신발 밑창이 흙길을 긁으며 미끄러졌다. 주머니 속 동전이 내 허벅지를 탁탁 기분 좋게 때렸다.
고모네 집은 큰집들이 모여 있는 길가에 있었다. 무거운 대문을 밀고 들어가면 가장자리에 커다란 장독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계단을 내려가면 넓은 마당이 나왔다. 아이들이 뛰어놀기 충분한 공간이었다. 마당에는 물이 콸콸 나오는 수도도 있었다.
유리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가면 마루가 나왔다. 진갈색 나무 마루를 건너면 고모가 있는 안방이 나왔다. 그 옆에는 사촌언니 둘의 방이 있었다. 고모 방은 우리 집을 다 합친 것보다 크고 따뜻했다. 늘 병석에 누워 있던 고모가 오늘은 일어나 있었다. 무표정하게 우리를 바라보았다.
가끔 고모 머리맡에는 판콜 상자가 있었다. 다 마신 작은 병 몇 개와 날카로운 금속 뚜껑이 베개옆에 굴러다녔다. 인사를 하면 고모는 앙상한 얼굴로 힘없이 바라보곤 했다. 들큼한 냄새가 방 안에 배어 있었다.
오늘은 기름진 전 냄새와 따뜻한 음식 냄새가 집 안 가득했다. 우리는 줄지어 서서 고모에게 세배를 했다. 집에서 받았던 돈보다 훨씬 큰돈을 받았다. 우리는 흘러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고모부는 명절에도 보이지 않았다. 고모는 밥상을 차려 주라고 새언니에게 시켰다. 새언니는 볶은 고기가 가지런히 올라간 떡국을 내왔다. 그리고 노릇하게 구워진 산적을 상 위에 올려 주었다.
나는 젓가락을 쉽게 들지 못했다. 언니와 동생 뒤에 숨어 전 한 개를 겨우 집어 먹었다. 입안 가득 기름진 맛이 퍼졌지만 목구멍에 걸렸다.
사촌 언니들은 우리 언니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다. 언니는 이미 사촌언니 방으로 건너가 재잘대고 있었다. 나는 마루에 서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주머니 속 돈을 만지며 슬금슬금 밖으로 나왔다.
길모퉁이에 작은 포장마차가 있었다. 어묵과 가래떡을 꽂은 꼬치들이 국물 속에서 불어 있었다. 고모네 집의 밥상보다 길거리 가판대가 더 편안했다.
나는 어묵 꼬치를 하나 들었다. 뜨겁고 짭조름한 국물이 목을 타고 내려가자, 긴장했던 마음이 풀렸다. 돌아가는 길에 공터에서는 아이들이 연을 날리고 있었다. 얼레가 팽글 돌 때마다 하얀 연실이 주르륵 풀려 나갔다. 꼬리를 흔들며 하늘을 나는 연을 보자,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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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들은 1970년대 바다 건너편 작은 집에서 자라던 어린 시절을 돌아보며 쓰는 이야기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처음부터 이어서 읽기:
[Memoir Part 1] Ep.1 - 회색 공장: 낮은 천장 아래 그려진 첫 지도
이전편 읽기:
[Memoir Part 1] Ep.4 - 마지막 밥그릇: 차례로 줄어드는 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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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moir Part 1] Ep.6 – 서캐: 머릿속에 남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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